러브 레터 (Love Letter, 1995)


 영화 러브레터의 ost인 유키 쿠라모토의 A Winter Story를 듣다 보면, 뭐랄까, 가슴 한 구석이 아련해진다, 라고 하면 더럽게 상투적일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는데 어쩔거야. 처음 이 영화를 보고 영화관을 빠져 나올 때는, 뭐랄까, 방학전날 내가 방학숙제를 하나도 하지 않은 것을 알은 엄마가 나를 때리다가 결국 눈물을 흘리고 나를 안아주는, 그리고 또 나는 같이 우는, 말하자면, 또 다음에 잘못할 거면서 반성하는 척하며 신파를 연기한 느낌이었다. 죄책감과 함께 찝찝한 감정이 나를 가지고 노는 날들이었다. 그리고 그 날들이 흐르다보니, 이제는 내 똥꼬에 털난것 뿐만 아니라, 이성의 음모(陰毛)까지, 그것도 몇명을 본 나이가 되었다. 1995년도 영화관 계단에 앉아 있던 찝찝한 감정 - 내가 왜 우는지 알 수 없는 - 은 잊혀졌다. 찝찝한 감정이 뭐냐. 기억도 가물가물한데, 그리고 지금은 기억을 또 다른 거짓말이라고 믿고 사는데, 나에게는 왜 영화에서처럼 비밀같은 아련한 추억이나 기억이 없을까. 새벽 1시 비가오는데, 문득문득 지붕 끝에서 떨어지는 비 알갱이처럼 가난하다는 생각. 재산이 없다는 생각.

한 가지 그런 기억이 있기는 하다.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지금은 '그녀'겠지만)그 여학생은 우리반이었다. 성격같은건 알 수가 없었고(얘기를 붙일 엄두가 안 났다), 나름대로 그 여학생은 학내에서나 교외에서 인기가 꽤 있었다. 그런거 어디서 다 주워들어가지고, 도저히 접근하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나는 연애라는 것을 한번도 해본적이 없는, 그러나 이상한 고백같지 않은 고백같은거는 어디서 주워들어가지고 몇 번해본 어설픈 남자였다. 아니 남학생이었다. 또한 나는 이상하게도 싸움을 잘 못했다. 그리고 한번도 덤벼보지도 않았다. 스스로는 참는거라고 생각했던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다 자기합리화지만......그리고 조금 야비했던 것도 같다. 여하튼 이런식의 자기비하가 점철되어있는데, 교내외로 인기있는 여학생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 여학생이 교내외로 인기가 있던 것처럼 남학생이었던 나는 내면도 외면도 누추했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순진하기 그지 없지만, 그때는 꽤 심각했었다. 그때 내가 생각하던 남학생의 모습은 이런 것이었다.↓

욕심이 많았던 것이다. 누구에게도 얘기한 적은 없었지만, 나도 저런 모습+싸움+운동+공부=의 모습을 바랐는지도 모르는게 아니라, 글쓰면서 생각해보니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꼴에 욕심이 많아서 '교내외에서도 인기있었던 그 여학생을 좋아했었다고' 합리적으로 생각해도, 그날, 교실에서 둘이 있던, 아침 햇빛에 업드려자던, 볼살이 입 옆으로 살짝배겨나온, 그 여학생은 나를 세상에서 지워버릴만큼 이상한 감정이라서 그것은 아무도 결론 내릴수가 없을 것이다. 그 여학생에 대한 나의 감정을 조금 합리화한다면, '그녀'가 되어있을 그 여학생에 대한 나의 기억은 합리적이지 않다. 거의 유일하게. 이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기억의 재산의 전부다.


"그 다음 얘기는, 너무 가슴 아파 보내지 못하겠습니다."
(후지이 이츠키 역, 나카야마 미호)

왜냐하면, 성인이 된 뒤 어느 술자리에서 그 여학생이 뒤치기를 그렇게 좋아한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아름다운 기억의 재산을 지키는 일은 이렇게, 슬프다.
영화 러브레터가 나에게 아련한 것은, 그런 기억이 있는 후지이 이츠키들에 대한 질투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by 프락치케이 | 2008/07/03 01:34 | 영화 | 트랙백

광화문 시위 현장에 대한 단상

 

 

누군가 젊은이들은 진중한 생각을 버티는 힘이 없다고 했다. 그 말은 결과적으로 옳은 말이다. 진중한 것의 기준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에게 진중한 것은 없다. 공포와 쾌락을 뒤섞인 ‘숭고’의 어떤 것이 젊은 세대에게는 없다. 다수의 젊은 세대는 공포란 것을 거세한 세대처럼 군다. 공포를 거세하기를 바라는 시대에 어쩌면 당연한 일 일수도 있다. 맹목적인 쾌락과 환락이 젊은 세대에게는 나뒹군다.

지금의 젊은 세대의 선배격인 세대가 가지고 있던 공포를 모르는 것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지금의 젊은 세대도 분명 그것을 알고 있다. 거세당한 채 수 많은 학원의 형광등 아래 있다.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이 살기 위해 일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며 편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왜?”라는 질문이 배어있고 현재의 젊은 세대는 스스로 억압하고 또 거세한다. ‘그렇기 때문에’가 아닌 ‘차라리’의 판단이 그들에게는 앞서 있다. 방안에 박힐 수밖에 없는 젊은 세포들은 두 가지 선택이 따른다. 이 세계의 구조에 편승할 것인가, 떠날 것인가. 이 혹독한 입사식에 구조에 편승하려는 젊은이들은 다수가 그 세계에 내가 들어간다면 나는 전 세대와 다르게 할 것이다. 바꿀 것이다. 생각한다. 반대로 떠나는 젊은이들은 아예 자신이 있었던 세계를 포기한다. ‘자유’를 생각하는 많은 이들은 그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편승의 무리들도 포기의 무리들도 간과하고 있는 하나가 있는 것 같다. 그들 둘 다는 ‘어쩔 수 없음’에 대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편승을 하던 포기를 하던 항상 어쩔 수 없다고 핑계를 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진중한 생각을 버틸 힘이 없는 이 세대들은 그럼에도 ‘그래도 이것만큼은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거리로 나갔다. 그러한 연유가 무엇이었던, 자신들을 ‘어쩔 수 없게’ 만든 사회에 대해 차라리 어쩔 수 없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들을 어찌하지 못하게 해보겠다는 보복의 감정이, 그러니까 체념의 배후에 묻어 있던 억압된 욕망 같은 것이 정말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거리로 뛰쳐나오게 만든다. 결국 젊은이들이 거리로 나온 사유는 정말 이기적인 것이지만 그들이 만든 이 거리의 풍경은 과연 가벼운 것인가 생각해볼 문제이다. 내가 대통령을 잘 뽑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감춰져 있던 야누스의 한 단면을 아주 효과적으로 분출되게 만들어줘서 이다. 대통령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by 프락치케이 | 2008/07/01 14:09 | | 트랙백(1)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